지평선 너머로 노을이 지고 있다. 둘은 전투를 막 끝내고 스팀 봇에서 내려와 적당한 높이의 바위에 걸터 앉았다.
저 멀리 적군의 잔해에서 피어 오르는 자욱한 연기를 멍하니 바라보던 갈색 머리의 여자가 문득 말을 꺼냈다.
"담비야. 만약 기계라는 게 없었으면 이런 전쟁도, 다툼도 없었겠지?"
"넌 그렇게 생각하는 거야?"
"응."
"난 그렇게 생각 안 해."
"그래? 왜?"
"원래 기계는 사람들을 위해 만들어진 거야. 그리고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고. 기계에게 무슨 잘못이 있겠어."
"하지만 증기기관이 없었으면 프랑스에서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을 걸? 올 필요도 없었을 거고."
어린 장인은 짧게 너털 웃음을 지었다.
"그렇긴 하지. 하지만 기계가 없어진다고 다툼이 사라지진 않을 거야. 지금 우리 눈 앞에 보이는 것은 이 전투 기계이지만 그 너머에 있는 것은 인간의 이기심이거든. 기계는 표면상에 보이는 껍데기일 뿐이야."
"치. 담비는 확실히 인간보다 기계를 좋아하는 것 같아. 그럼 인간이라면 결코 싸움을 피할 수 없는 걸까?"
"그거야 모르지."
어린 장인은 어깨를 으쓱하고는 스팀 봇의 다리에 그려진 조선국기를 바라본다.
"한 가지 확실한 건 지금은 싸움을 피할 생각을 할 때가 아니라 맞서 싸울 생각을 해야할 때란 거야. 마코토, 너의 조국과 조선의 독립전쟁은 이제 시작이니까."
19세기는 제국주의가 만연하던 때였다. 문명적으로 뒤떨어져 있던 일본과 조선은 증기기술을 바탕으로 한 막강한 군사 장비를 보유한 서양 강대국들의 군사적 압박에 별다른 저항도 하지 못하고 식민지가 되고 만다. 프랑스, 영국 등의 서양 열강들은 여러 불평등 조약으로 일본과 조선을 수탈하는데 열을 올렸다. 그들이 특히 주목했던 것은 동아시아에서 많이 발견되고 있는 증기탄이었다.
증기탄은 석탄과 같은 고체 천연자원으로 연소시 고열, 고압의 증기를 발생시키는 물질이다. 다른 화석연료와는 달리 정제, 연소시 발생하는 연기와 연소 후 남은 잔재가 깨끗하여 조선에서는 예로부터 이 증기탄을 난방, 취사용으로 널리 사용해왔다.
△ 간헐적으로 수증기를 내뿜고 있는 증기탄 원석
18세기 초 유럽에서는 이 증기탄을 이용하여 강력한 동력을 얻는 증기기관이 발명되었고 그 여파로 사회전반에 걸쳐 기계 자동화가 이루어졌다. 증기탄이 사회를 유지, 발전시키는 큰 동력원이 된 이 시대를 증기혁명의 시대라 부른다.
고도로 발달한 유럽의 증기기술은 19세기 중엽 증기기관을 사용한 범용 4족 보행 로봇을 탄생시키기에 이른다. 이 로봇은 스팀 봇이라 불렸으며 운송, 건축 분야에서 주로 쓰였다.
스팀 봇이 전투용으로 개조되기 시작한 것은 그로부터 몇 년 후의 일이었다. 증기혁명 이후 생활 곳곳에서 쓰이게 된 증기기계들은 유럽 내에 매장된 증기탄을 빠르게 고갈시켜갔고 유럽의 여러 국가들은 보다 많은 증기탄을 확보하기 위해 해외로 눈을 돌렸다. 하지만 전세계에서도 증기탄이 발견되는 곳은 한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각국은 양질의 증기탄 식민지 개척을 위한 알력 다툼을 하게 된다. 이는 무한 군비 경쟁으로 이어졌고 여러 나라들이 강력한 전투 스팀 봇을 개발하는데 힘을 쏟게 되는 계기가 된다.
서기 1885년 현재까지 조선은 프랑스로부터 사실상 속국 취급을 받았으며 심한 정치적 간섭을 받고 있었다. 조선은 몇년부터 비밀리에 행해진 군사 훈련을 통해 전쟁을 위한 관군을 육성하는데 성공하였고 올해 프랑스를 상대로 독립전쟁을 포고하였다.
△ 상공에서 촬영한 전투 스팀 봇과 서포터
담비는 조선의 청년 장인이다. 고아 출신인 그는 유년기를 마을의 대장간에서 보냈다. 어려서부터 영특했던 그는 조선 장인들이 일하는 모습을 보고 구식 기계장치의 원리를 빠르게 습득하였다. 어느 날 이동 중인 프랑스의 거대한 스팀 봇을 보게 된 담비는 증기기관을 비롯한 서양의 기계기술에 큰 관심을 갖게 된다.
두루 인정받는 기계 기술자가 된 그는 18세가 되는 해에 조선 관청의 감사에게 밉보여 마을에서 추방당하게 된다. 마을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외각지역에 개인 작업장을 세운 그는 증기탄을 이용한 증기기관을 연구하는데 힘을 쏟는다. 이미 서양에선 널리 쓰이고 있는 기술이었지만 신진 기술들에 대한 정보는 철저히 통제되어 조선인들이 쉽게 접할 수 없었기 때문에 조선에서 증기기관을 이해하고 제작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주위에서 기술적인 도움을 얻기 힘들었기에 연구의 진척은 그리 빠르지 않았다.
21세 때 그는 증기기관 연구에 결정적인 도움을 얻을 기회를 맞는다. 농축 증기탄에 대한 자료를 찾기 위해 잠시 서울에 머물고 있던 담비는 고향 마을 근처에서 프랑스군과 미국군의 전투가 벌어졌다는 소식을 듣는다. 부리나케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마을 사람들과 함께 전장을 수색했고 미처 회수되지 못하고 방치되어 있던 미국군 스팀 봇의 잔해를 찾아내는데 성공한다. 스팀 봇 잔해 분석을 통해 서양의 기술을 익힐 기회를 얻게 된 그는 예상치 못했던 손님으로부터 또 다른 큰 도움을 얻게 된다.
담비는 담비와 같은 목적으로 마을 근처를 떠돌던 일본인 유학생 마코토를 만나게 된다. 마코토가 프랑스 유학 시절 때 입수한 소형 증기기관 설계도면을 넘겨받은 담비는 1년만에 1000마력 규모의 대형 증기기관을 완성하는데 성공한다.
마코토는 일본 메이지 천황의 딸이다. 서양 문물을 배우기 위해 어린 나이에 조국을 떠나 유럽에서 유학을 시작하였다. 일본의 개혁 과정에 태어난 그녀는 프랑스어, 한국어, 일본어에 능통하며 배움과 깨달음에 대한 강한 의지를 갖고 있다.
적극적인 성격의 그녀는 일본을 지배하고 있는 미국에 강한 반감을 갖고 있으며 일본의 독립을 위해 어떤 일이라도 감수하려 한다. 일본이 서양의 나라에 비해 뒤쳐지고 있는 것은 과학 기술의 부재 때문이라 판단한 마코토는 증기혁명 시대 문명의 결정체, 스팀 봇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이 무렵 미국과 프랑스는 식민지 분쟁으로 외교 마찰이 잦았다. 프랑스에서 유학 생활을 하던 마코토는 미국의 통제하에 있는 일본 본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근처 조선으로 들어와 조국 독립의 실마리를 찾기 위해 애쓴다.
마코토는 단신으로 스팀 봇을 찾기 위해 숲 속을 헤매던 중 담비의 작업장을 우연히 발견하게 된다. 이방인을 배척하는 풍토가 만연했던 시대라 관청이 있는 마을에 쉽게 출입하지 못했던 마코토는 담비의 작업장에서 한동안 머물게 된다.
담비의 작업장엔 프랑스 유학 시절 때도 보지 못했던 온갖 신비한 발명품들이 즐비했다. 마코토는 조선의 전통 기술과 서양 신진 기술의 묘한 결합으로 이루어진 그 기계들로부터 묘한 매력을 느꼈다. 마코토는 담비의 차분한 성격과 증기기술에 대한 집착, 그리고 회수해온 미군의 스팀 봇 잔해를 분석하는 모습을 보고는 그가 동양과 서양의 기술력 차이를 단기간에 좁혀줄 수 있는 인재일 거라 판단하였다.
담비의 작업장에서 일주일간 머물던 마코토는 그동안 애지중지 보관해왔던 증기기관 설계도면을 담비에게 보여준다. 그 설계도면의 진가를 알아 본 담비는 뛸 듯이 기뻐한다. 마코토는 만약 담비가 스팀 봇을 만드는데 성공한다면 그 기술력을 일본의 독립을 위해 써줄 것을 조건으로 담비에게 설계도면을 넘겨준다.
그 후 2년 동안 마코토는 담비의 연구 활동을 다방면에서 도왔고 담비는 마코토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스팀 봇을 완성한다. 마코토는 스팀 봇 생산 시설 완비와 자재, 인력 조달을 위해 조선왕조로부터의 지원을 얻어내고 조선왕조와 일본 왕실 간의 조일동맹을 체결하는데 큰 영향을 주는 등 19세기 야사에서 가장 수완이 좋은 인물로 기록된다.
조선이 프랑스를 상대로 선전포고를 한 1885년의 직전 해에 마코토는 유학 시절 때부터 꾸준한 운동으로 다져진 뛰어난 순발력과 운동신경을 바탕으로 동양인 최초의 스팀 봇 서포터 조종사가 된다.
1832 영국상선 로드아마트호가 황해도에서 통상요구
1846 프랑스 군함 3척이 프랑스신부처형에 관한 항의(1801 신유박해 천교도인 사형)
1848 영국, 프랑스, 러시아, 미국이 중국에 진출하면서 조선에게도 통상요구
1860 최제우의 동학 창시
1868 일본 메이지 유신
1876 일본과 강화도 조약
1882 임오군란(조선의 구식군인들의 반란)
1884 갑신정변(개화세력이 일본의 도움으로 왕권에 도전하려하였으나 명성황후가 청에 도움을 청하여 실패)
1886 스크랜튼 선교사 이화학당 설립
"이원복 교수와 함께 만화로 보는 나란나란 세계사, 도란도란 한국사" 책에서 연도 뽑은것이여.
위의 스토리의 연도가 1885로 구체적으로 나온것은 실사와 황당하게 다르기에 혹 독자들이 일전 '침대는 가구가 아님니다'라는 광고 문구에서 초딩들의 시험문제에서 다음 중 가구가 아닌것은에서 '침대'를 고른 사건이 일어나지 않을까, 노파심이 드네.
가상의 공간인 만큼 한국, 일본, 미국, 프랑스라는 구체적인 국가 명보다 이를 페로디하여 항국, 이본, 멱국,브렁스 등으로 하고, 연도도 *885 라든지 01885 등으로 표기하여 제국주의 난무시대임을 암시하면서 실사와 다르게 각색하는게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