벙어리란 말의 정확한 정의가 뇌에 들어있지 않았었다.
주위에서 벙어리를 볼 일이 없었기 때문에
그냥 전설 속에서나 볼 수 있는 존재와 같은 느낌이었다.
저기 산 위엔 불을 뿜는 용이 살고 있대! 와아, 정말? <- 이런 느낌이랄까...
누구에게 물어볼 일도 없었고, 옛날 소설이나 글 같은 곳에서
주워 들은 지식 정도만 있는 상태였다.
어디선 벙어리라고 해서 말을 못하는 캐릭터로 등장하고
어디선 벙어리라고 해서 듣지를 못하더라.
근데 이 두 특성이 좀 다르잖아?
말을 못 하는 건 입이나 혀, 목에 대한 문제고
듣지 못하는 건 귀에 문제가 있는 건데.
어떤 쪽이 맞는 거지?
그냥 말 못하는 사람과 못 듣는 사람을 통틀어서 벙어리라고 부르는 것인가?
...하고 깊이 생각해보지는 않고 그냥 휙 지나쳤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 문득 궁금해져서 사전을 찾아봤다.
벙어리의 정확한 정의는 말을 못하는 사람.
선천, 후천적으로 청각이나 발음 기관에 문제가 있어서,
혹은 처음부터 말을 배우지 못해 말을 할 수 없는 사람을 이른단다.
그러니까 청각은 멀쩡한데 발음 기관에 문제가 있어서
들을 수는 있지만 말하지는 못하는 벙어리가 있을 수 있다는 말이다.
일반적으로는 청각의 문제로 인해 말을 못하게 되는 경우가 많아서
벙어리란 말이 듣지 못하는 사람까지 의미하는 게 조금 있는 듯.
근데 왜 청각의 문제 때문에 말을 못하게 되는 건지 의문이 생겼다.
청각 기관과 발음 기관은 분리되어 있는 별도의 기관인데 말이지?
답은 간단히 나왔다.
두 기관이 별도의 기관이긴 하지만 다루는 신호가 소리라는 공통점이 있다.
발음 기관은 소리를 만들어내는 출력 기관,
청각 기관은 외부의 소리를 받아 뇌로 전달하는 입력 기관이다.
외부의 소리를 못 들어도 소리를 내려고 하면?
귀를 막는다고 말을 못 하나?
충분히 낼 수 있다.
근데 어떤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소리를 못 들었다고 가정해보자.
소리는? 낼 수 있을 것이다.
발성하는 건 근육을 움직이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으니까.
하지만 특정한 소리를 내거나 말 소리를 내는 건 가능할까?
못할 것이다.
느껴보지 못한 걸 어떻게 재연할 수 있을까?
사람이 말을 배우고 쓰게 되는 과정을 자세히 생각해보았다.
청각 기관이 정상적인 사람은 일단 말이란 걸 듣게 될 것이다.
그리고 어쩌다가 자신의 입으로 소리도 내볼 것이다.
그러면 자신이 낸 소리가 목과 얼굴을 따라 내부에서,
또 바깥 환경에 튕겨져 나와 외부에서 귀를 자극한다.
그러면 깨달을 것이다.
주위에서 부모가 하는 말과 비슷한 신호를
자신도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을.
이제 따라해볼 것이다.
따라하는 이유는 어떤 목적을 위해, 혹은 그냥 무조건적인 것일 수도 있겠다.
따라하는 건 어떻게 할까?
말을 듣고 기억한다.
그리고나서 어떻게 할진 모르겠지만 일단 소리를 내본다.
기억한, 따라하고 싶은 말과
방금 자신이 내서 들려온 소리 둘을 비교한다.
비슷한가?
아닌 것 같으면 다시 해본다.
조금 힘을 주는 방법을 바꿔서.
비슷한가?
다르면 또 바꿔서 해본다.
많이 하다보면 어떤 식으로 발음 기관에 변화를 줬을 때
나오는 소리가 어떻게 변하는지 알게 될 것이다.
그 감을 이용해서 좀 더 섬세하게, 따라하고 싶은 말을 흉내내본다.
잘 따라했다는 판단은 스스로 할 수도 있을 거고,
부모의 칭찬이나 좋은 행동으로 알 수도 있을 것이다.
(... 인문학자들도 "보상"이란 표현을 쓰나?)
여기까지 생각하니 왜 청각 이상으로 인해 말을 못하게 되는 것인지,
벙어리란 말이 왜 말 못하는 사람과 듣지 못하는 사람을 애매하게 지칭하게 됐는지
깔끔하게 이해가 됐다.
뇌리에 황금선이 그어지는 게 느껴진다.
소리를 듣는 것은 소리를 내는데 굉장히 필요한 것이었다!
좀 더 일반화해서 보면
사람이 뭔가를 학습해서 뭔가를 만들어내는 과정은 대부분 이 경우와 비슷할 것이다.
느낀 것으로부터 뭔가를 만들어낸다.
만들어낸 것을 다시 느낀다.
만족스러운가?
만족할 때까지 반복한다.
왜, 흔히들 보는 눈이 중요하다,
눈높이를 높여야 된다,
보다 넓게 볼 수 있어야 된다 등의 말을 하지 않는가?
(제기랄, 드디어 제목과 관련된 내용이 나왔다!)
그 말이 바로 이런 원리를 가리키는 말이었던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그림을 잘 그리고 싶어하는 경우를 생각해보자.
어떻게 하면 좋을까?
학원에 등록해서 배워볼까? 네이버에 잘 하려면 어떻게 해야하는지를 물어볼까?
불확실하고 막막한, 수행할 수 있으리라 확신할 수 없는, "어려운" 문제다.
하지만 이 사람에게 어떤 그림을 보고 이 그림이 잘 그려진 그림인지
그렇지 않은 그림인지를 판단할 수 있는 눈과 지능이 있다고 생각해보자.
일단 그림을 그려보자.
맘에 안 드는가?
다시 그리자.
맘에 안 드는가?
다시 그리자.
이러면 누가 그리는 법을 가르쳐주지 않아도 스스로 그린 그림에 대한 판단과
재시도를 반복하면서 잘 그린 그림을 그려낼 수 있게 된다.
이러면 물론 쉽지는 않지만 시간과 노력만 들이면 확실히 풀 수 있는, 끝이 보이는, "힘든" 문제가 된다.
느끼고 판단하는 좋은 기준을 갖고 있다면
자신이 그런 좋은 결과를 내는 것은 시간문제가 된다는 말이다.
... 사실 "시행착오"란 말을 찾아보니까 손다이크란 사람이
이미 오래 전에 위에 적은 것과 거의 똑같은 내용의 "시행착오학습의 원리"를 발견했단다.
젠장, 역시 지구상에 새로운 것은 없어 (?)
난 "조상들의 논문 읽기"란 쉬운 학습법이 아닌 시행착오학습을 통해
시행착오학습의 원리를 직접 학습한 것이다-_-
... 이뭐 삽질.
이건 딴소린데 난 참 천성적으로 직접 시행착오를 겪는 걸 좋아하는 것 같다.
강의실에서 교수가 떠드는 거 한참 듣는 것보다 직접 해보고 아, 하고 느끼는 게
훨씬 이해도 잘 되고 기억도 잘 된다.
내참, 인생 참 피곤하게 사네.
여튼 간단히 정리하면 역시 보는 눈은 중요하다?
여운은 학습이 이루어지는 기본적인 방식이 저런 것이라면
사람은 무에서 유를 창조할 수는 없다는 말에 좀 더 신뢰가 간다는 것.